Tagebuch

[2004.06.28] SUICIDE

구름처럼붉은 2004. 6. 28. 14:27
 어제 셀모임 시간에 주제와 관계 없이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A
: "근데, 자살해도 구원 받을 수 있어요?"

  B : "자살해도 구원받을 수 있지."

  C : "자살하면 구원받을 수 없지. 성령안에 있는 사람이 자살을 하겠어? 하나님이 가만 두시겠어?"

  사람들은 강요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못할 것이 무엇이냐고. 가장 낮아지신 예수님을 보라고. 자살의 선택은 결단코 구원받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시다.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도 식량과 기초 의료품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 (미국 9.11 테러때의 사상자가 6천여명이었던 것에 반해 순전히 기아로 죽는 5세미만의 아이가 하루에 2만명이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보고 계심을 믿는다.

  차라리 그들의 죽음을 자살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키우지도 못하면서 대책없이 낳기만 하는 그들에게 자살이라는 멍에를 씌어야 하지 않을까?

  난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모든 논쟁과 주장에서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한 언어에 매달려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뭐냐하면, 모두가 인정하거니와 언어는 현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임의대로 '자살(suicide)'이란 카테고리를 정했지만, 실제의 현상들이 '자살'이란 단어로 조합되어 한 데 취급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쉽게 '자살'이라고 하지만 여러가지가 있다. 내적 허무에서 오는 자살과, 사회구조적 압력에서 오는 자살,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는 살신성인도 일종의 자살인 것이다. Chronic Suicide란 말이 있다. 만성적(?) 혹은 장기적 자살이라고 표현하면 올바를까? 우리는 사실 모두가 chronic suicide를 행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받는 스트레스, 건강에 해로운 음식들, 생활 습관. 모두가 당장 생명을 앗아가지는 않지만, 장기적으로 수명을 단축시킬 것들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혹은 무지로 행하고 있는 자살들을 또 어떻게 볼 것인가?

  자살을 한 분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분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따르기 원하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계시며 자신의 몸을 맡기셨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럼 예수님도 우리의 논의에서 제외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 땅에 들어가면 죽을 것을 알고 순교하신 분들은. 그 분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었으므로 제외하자.

  선교사로 나갈 믿음(?)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혹은 발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강요를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만 남아있다. 구원을 받았음에도  믿음 없음에 하나님은 모른다고 하실 것인가? 아니면 믿는 감정만을 가지고 있지 이제보니 구원받지 못하였구나 라고 하실 것인지.

  나는 자살에 대해 결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결단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을 자살로 내 몬 책임은 누가질 것인가? 

  나는 여기서 우리가 자살이라 부르는 동일한 현상을 사회적 타살이란 다른 말로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다.

  사람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이 아님을 이제는 누구나 인정한다. 육체적 폭력이 한계를 넘어서면 사람은 더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인격적, 사회구조적 폭력이 한계를 넘어서면 그 사람은 더이상 견딜 수 없다.

  극한 상황을 이겨낸 몇 사람을 들먹여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지는 말자.

  우린 종종 영화의 장면에서 고문 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주된 레파토리는 고문관은 고문을 즐기며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고 (때로는 "중요한 정보를 말하라"고 하고, 혹은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라고 한다) 고문을 당하는 배우는 "차라리 죽여라"며 절규한다. 내 생각에는 분명 그 순간 진심으로 그 자리에서 죽기 원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힘든 고문으로 죽을 바에는 말이다.) 어쩌면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는 우리의 주인공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구해주실 것이다. 어떠한 시련도 견디어 내리라'라는 의지를 기대할 수도 있겠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만 한가? (이 질문은 의미가 없긴 하다. 하지만 보다 앞서 참으로 그런 마음을 품는 자 구원받은 백성인가.)

   나는 여기서 우리의 몸과 정신과의 관계에 대해 조금 언급하고자 한다. 생각처럼, 혹은 생각 이상으로 우리의 몸과 정신은 밀접하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신앙과 의지라기 보다는, 우리의 육체에 대해, 그리고 그에 따른 신경전달 물질에 대해 크게 좌우된다. 지금까지 약간의 배운 지식과 지금의 나의 경험으로는 그렇다.

  자 그럼 이야기는 이제 허무해지고 있다. 너무나도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죽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켜보고만 계신단 말인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많은 경우에 내가 아는 하나님은 자연적인 방법을 초월하면서 까지 모든 고통을 이길 힘을 주시는 분이시라기 보다는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다.(능력 유무의 문제가 아니다) 매사에 혹은 어떠한 사건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분명 가치있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겠다는 것은 (혹은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안에 가둘 수 있다는 억지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범위를 넓혀 살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살인은 결단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사단의 역사라 생각한다. 하지만 살인을 행하였다고 해서 우리를 구원에서 끊을 수 있을까? 또한 그 살인을 내버려 두신 하나님은 뜻은 어디에 있는가? 왜 막지 않으셨는가?

  기독교는 행위의 종교가 아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지만 쉽게 추측해 보기도 한다. 저 사람은 구원받은 증거가 없는 것 같아.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다. 살인자, 강퍅한 자들, 착취하는 자. 그들에게도 변명은 있다. 태어나 보니 자신의 신분과 환경이 그러하였다고. 그래서 하나님은 선행이나 행위로 구원하시지 않으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죽을만한 심리·사회적 폭력(그것은 마치 죽어라고 말하는 사회적 강요)이 미치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남에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과연 우리는 그 상황에서 이겨낼 만한(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  믿음이 적은 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게 되는가.

  이런 시각에서 보려면 주제범위를 오히려 자살에서 보다 넓혀야 할 것이다.

  교회에 다닌다고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고 영접해야 구원이 임한다는 것. 그 구원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죄스럽긴 하지만 우리의 임의로 행동을 보고 구원 받았을꺼야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

  그렇게 의견이 조정된다면 나는 당신들의 의견에 동의 할 수 있다.

  결국 최종의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그들의 구원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구원을 먼저 돌아보기 원한다.'는 진부한 말로 지루한 생각을 마무리 한다.

<사족> 글을 쓰고도 깨운치 않은 것은 현실과는 괴리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실 글을 쓰며 내 머리를 맴돌던 극한 상황을 제외한 경우 과연 저들이 자살을 했어야만 했는가. 그들 가운데 복음이 있는가 하는 의문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글을 쓰는 나조차 그들의 견디기 힘든 고통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생각할 때 나의 글이 부끄러워진다. 예수님이 하신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란"라는 말씀에 헷갈리기도 한다. 나의 바라는 바는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 깊은 고민 없이 쉽게 판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안에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의 생각은 어떻게 또 달라져 있을 지. 이 글을 보며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